극한의 심해, 해저 화산에 사는 바다 달팽이
지구상 최악의 환경으로 꼽히는 심해 열수 분출공에서 온몸을 철갑으로 두른 채 살아가는 기묘한 생명체, 비늘발달팽이의 놀라운 생존 전략을 소개합니다. 400도의 뜨거운 연기와 엄청난 수압을 견디며 스스로 철제 갑옷을 만들어내는 과정부터, 몸속 세균을 위해 자신의 장기마저 포기한 파격적인 진화 이야기까지 신비로운 심해 생태계는 많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중세 기사를 닮은 철갑옷의 비밀과 3층 구조의 위력
2001년 인도양 수심 2,700m 심해에서 발견된 비늘발달팽이는 전 세계 학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 유일하게 철 성분으로 된 외피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달팽이의 껍데기는 정교한 3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깥층은 황화철 결정이 박힌 철질 방어층이며, 중간층은 충격을 흡수하고 분산시키는 두꺼운 유기물층, 마지막 안쪽 층은 일반 달팽이와 같은 탄산칼슘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MIT 연구팀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게의 집게발이 며칠 동안 강력한 압박을 가해도 이 특수한 3층 구조 덕분에 껍데기는 전혀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완벽한 방어력을 갖춘 셈인데, 이들은 주변 열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화수소와 바닷물의 철 이온을 흡수해 스스로 나노 입자 크기의 철 화합물을 합성하여 이 경이로운 갑옷을 완성합니다.
외부 방어는 보너스, 내부 독소를 처리하는 생체 촉매제
비늘발달팽이가 이토록 튼튼한 철갑을 두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포식자인 독침 달팽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으나, 2006년 연구를 통해 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철갑옷의 주 목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독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늘발달팽이의 몸속에는 에너지를 만드는 '황산화 세균'이 살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치명적인 독성 부산물이 생성됩니다. 이때 달팽이 껍데기의 철 성분이 자동차의 촉매 변환기처럼 이 독소를 흡수하여 무해한 철 황화물로 바꿔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외부 포식자를 막는 강력한 방어력은 내부 독소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얻은 일종의 보너스였던 셈입니다. 하나의 장치로 생존에 필요한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진화의 영리함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뇌와 소화를 포기하고 세균에게 운전대를 맡긴 파격적 진화
비늘발달팽이의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면 더욱 경악스러운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동물들과 달리 먹이를 전혀 먹지 않습니다. 대신 식도샘이라는 거대한 기관에 수십억 마리의 황산화 세균을 키우며, 이 세균들이 열수구의 화학 에너지를 분해해 제공하는 영양분만으로 삶을 이어갑니다. 이 세균 공장을 유지하기 위해 달팽이는 파격적인 신체 개조를 감행했습니다. 세균들에게 충분한 산소와 황화수소를 공급하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몸 부피의 4%까지 키웠는데, 이는 인간 심장 비율의 13배가 넘는 엄청난 크기입니다. 반면 세균들이 들어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뇌 기능과 소화 기관은 과감히 퇴화시켰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마치 세균들이 달팽이라는 택시의 운전대를 잡고 열수구 근처로 가도록 조종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5억 년을 버틴 살아있는 화석의 위기와 인류의 숙제
유전자 지도 분석 결과, 비늘발달팽이가 비늘을 만드는 유전자는 무려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 시대부터 존재해 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5억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이 위대한 생명체는 현재 인류의 기술로도 흉내 내기 힘든 저온 철 가공 시스템을 몸속에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발견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아 멸종 위기종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들이 사는 심해 열수 분출공에 잠긴 구리, 금, 은 등 값비싼 광물을 노린 무분별한 채굴 계획 때문입니다. 전 세계 서식지를 다 합쳐도 축구장 3개보다 작은 좁은 지역에 모여 사는 이들은 인류의 욕심 앞에 역사상 최초로 심해 채굴 때문에 멸종될 위기에 처한 생물이 되었습니다. 5억 년을 살아남은 생명의 신비가 한순간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사라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이제 우리 인류에게 남겨진 무거운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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