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양식에 필요한 굴 껍데기

우리 식탁 위 가성비 최고의 반찬이자 이제는 세계적인 K-푸드로 자리 잡은 김. 하지만 우리가 김을 이토록 저렴하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70여 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영국의 한 식물학자가 발견한 굴 껍데기의 비밀이 김 양식의 역사를 바꿔놓기도 했습니다.


도박과 같았던 과거의 김 양식과 사라진 여름 김의 미스터리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김 양식은 오랫동안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하는 도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바다에 나무를 꽂아두고 김 포자가 우연히 달라붙기를 기다리는 '지주식' 방법을 사용했는데, 김의 생애 주기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겨울에 잘 자라던 김이 날씨가 따뜻해지는 여름만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찬 바람이 불면 다시 나타나는 현상은 어민들에게 커다란 수수께끼였습니다. 여름 동안 김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숨어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인위적으로 김을 키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영국 식물학자가 찾아낸 김의 '여름 별장', 굴 껍데기

1949년, 이 미스터리를 해결한 주인공은 뜻밖에도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식물학자 캐슬린 메리 드루 박사였습니다. 그녀는 김 포자를 인공적으로 키우는 연구를 하던 중, 수조에 굴 껍데기와 조개 껍데기를 넣고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김의 포자가 실 모양으로 변해 굴 껍데기 안쪽을 파고들어가 자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전까지 '콘셀리스'라는 별개의 생물로 알려졌던 것이 사실은 김의 여름철 모습인 '패각 사상체'였던 것입니다. 즉, 김은 봄에 포자를 만들어 굴 껍데기 속으로 숨어들었다가, 가을에 다시 포자를 방출해 우리가 아는 김의 모습으로 자라나는 복잡한 생활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 양식에 반드시 굴 껍데기가 필요하다는 이 발견은 현대 김 양식 산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김에게 굴 껍데기는 생존을 위한 최고의 '방공호'

김은 왜 하필 딱딱한 굴 껍데기 속으로 파고드는 전략을 선택했을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과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여름철의 뜨거운 수온과 강한 자외선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얇은 김 포자에게 여름 바다의 직사광선은 치명적이지만, 굴 껍데기 안은 온도가 일정하고 빛을 차단해주는 완벽한 동굴 역할을 합니다. 둘째, 건조함으로부터의 보호입니다. 조수 간만의 차로 물 밖으로 노출될 때 굴 껍데기는 수분을 유지해 포자가 파괴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와 같은 포식자들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생존 벙커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김은 식물일까? 미역·다시마와는 다른 김의 족보

우리는 흔히 김, 미역, 다시마를 한데 묶어 해조류라고 부르지만, 생물학적으로 김은 미역과 조상이 완전히 다릅니다. 김이 속한 홍조류는 육상 식물과 공통 조상을 공유하는 '고색소체류'에 속하며, 넓은 의미에서 식물계의 일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미역이나 다시마 같은 갈조류는 식물보다는 짚신벌레와 같은 선모충류와 더 가까운 족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유전적으로 김은 미역보다 우리 주변의 나무나 풀과 훨씬 가까운 사이인 셈입니다. 얇고 바삭한 김 한 장 속에 영국의 식물학자가 바친 9년의 헌신과 수십억 년 진화의 신비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오늘 저녁 김 반찬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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